헤일즈의 상대주의

헤일즈가 제시한 상대주의의 일반적인 인상은 이러하다. 그가 직접 제시한 것들인데 (1) 다른 문화 / 언어 / 개성에 따라 다른 노선을 따르므로 입장들은 통약불가능하다. (2) 개념들은 모호하고 비결정적이므로 정확도를 살리는 것은 자의적이며 인위적이다. (3) 진리조건적 의미론은 개연적 예측이거나 인식적 양상이므로 상대주의적인 접근법이 문제 해결을 한다. 이들에 대해 받아들여야 할 때 (1)이나 (2)는 (3)에 대한 설득력을 약화시킨다. 인정할 수 있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화된 이론으로서는 부적격이다. 그래서 이에 대해 심화시켜서 살펴보는 것을 의도한다고 한다.

살펴봐야 될 것으로 논의를 할 것은 (1) 철학적 개념에 대한 상대주의라는 입장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을 거부한다. (2) 살펴봐야될 상대주의적 노선은 인식론적이고 이성적으로 성립될 수 있으며 비추론적 믿음에 관해 이성적인 기반에서 통합가능한 인식조건이 있다. (3) 모든 사람들이 철학적 명제에 대한 믿음을 갖는데 있어 똑같은 방법을 채택할 수는 없고 같은 종류의 개념만을 공유하지는 않으며, 반성적 균형감각을 관련시키지도 않는다. 반성적 균형감각은 필요하다. (4) 서로 다른 방법이 항상 같은 결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5) 이를 이해할 기반을 찾을 때, 진리 결정을 이루어내면서도 상대주의를 성립하게 하는 다양성(다원론)이 된다.

그는 이성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으나 개념적 이해 이전의 직관적 유래를 인정한다. 직관으로 그가 두는 두가지 대표적 직관으로 물리적 직관과 이성적 직관을 든다. 물리적 직관은 인지된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의 일관된 일반화의 조건이며, 이성적 직관은 철학의 영역에서 가능한 근본적이고 토대적인 판명의 조건이다. 상대주의는 두가지가 조화롭게 운용될 수 있고 이성으로 나아갈 기반이다.

프레게 이후에 개념적 사고는 필요충분적인 믿음의 정당화 조건을 확보한 분석철학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무엇이 철학적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것인데 날카로운 구분이 흐려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선험적인데 어떤 것은 후험적인 경향을 동시에 갖는다. 이를 위해 대표적 사례를 살펴본다고 한다. 즉 날카로운 구분이 불가능한 경우의 모순의 부담을 가지고 직관의 방법으로 어떤 명제를 정당화한다는 제안은 자기충족적인 기반을 지닌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제시를 한다고 한다.

그가 완전하게 찬성하지는 않지만, 공감할 수 있는 직관의 구조(deliverance)는 기초적이고 비추론적인 근거라고 하는 제안이다. 이성 이전의 비추론적 감각자료는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성적 직관이 거짓이 될 이유는 도처에 널려있다. 경험적으로나 더 진전된 직관으로부터 반박될 수도 있다. 이는 합리주의자들에게서 흔한 일이다. 반성적 균형(형평성)은 믿음의 집합에 따라 성립할 철학적 관점을 해명해준다. 합리적인 논자가 직관적 접근법에 대해 구조화할 수 있는 것은 합리성이므로 이에 대한 개요를 그린다고 한다. 그러나 합리주의를 전면적으로 옹호한다기보다 타당성이 있음에도 비판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이는 공감이 됨을 보이는 것이다.

합리적 직관은 믿음 귀속적 전통에서 독단이 될 수 있으며 직관 외에도 진리 판단에 채택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제의나 환각제가 p를 믿으라고 하거나, p아님을 믿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호해야 하는가? 이는 상대주의를 부주의하게 정식화하면 예컨데 모든 것은 참이다라고 할 때 모순적인 결과를 일으키는 현상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철학적 믿음이다. 이해가능하며 안정적인 철학적 논거를 찾으면 된다. 이성은 기본적 믿음을 대상으로 하고 보다 더 이해할 수 있는 철학이론으로 발전되게 한다. 충돌이 있다면, 부차적으로 가능한 방법론에 대한 반성적 균형에 의해 일차적인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 (통약가능성) 이론적 언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를 겉어내고 나면 모든 연구에 직관이 기저에 남는 것이다.

비추론적 믿음은 직관의 한 구성 요소지만, 예측이나 믿음 귀속의 구조(deliverance)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이 믿음의 한계는 심각하다고 헤일즈는 말하는데 이로 인해 귀결되는 세가지 결과는 이렇다.

(1) 회의주의 – 비추론적인 믿음에 그친다면 철학적 지식이 없는 것이므로 철학적 명제들을 아는 방법이 없다. 모든 것을 운에 맞긴다.
(2) 허무주의 – 구명가능한 철학적 명제란 없다. 비인지적이고 경험적이라는 것이 공공연하다.
(3) 상대주의 – 철학적 명제의 진리 결정은 상대적이고 경우에 따라 독단적으로 관점에 의한다.

그는 이들을 이해가능하지만 배격하겠다고 한다.

상대주의는 자기논박적일 수 있으나 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안을 제시한다.

우선 “절대적”, “상대적”이라는 술어는 양화사의 종류이고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고 하는 자기논박적 동기이기보다 “참인 것은 모두 개연적으로 참이다”임을 직관한 것에 기반해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기보다 “참인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참이다”라는 제안을 지지함을 보일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는 언명은 비일관적이다. 상대적이라서 진리 결정을 거부한다면 자기 주장도 진리가 아니라는 자기논박적인 모순을 함축한다. 그러나 개념을 인정하고 합리적 이성을 인정한다면, 추론적으로 믿음과 사실들의 관련성을 인정함을 의미하므로 명제들간의 상대적인 관련하에 참/거짓을 가릴 수 있게 된다. 즉 “참인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참이다”라는 것은 가능한 이론적 입장이 되는 것이다.

과학적 판단

  1. 사람은 건강이 나빠지면 죽는다.
  2. 담배를 피우는 것은 건강을 헤친다.

철학적 판단

  1. 사람은 건강이 나빠지면 죽는다.
  2. 담배를 피워서 연기를 내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와 같은 판단은 각각을 구성하는 명제들과의 상대적인 구조 하에서 참거짓이 가려진다. 느낌이 확 오게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들었는데 이는 과학적 판단과 철학적 판단도 같은 경우임을 보인다. 각각을 구성하는 추론 조건들의 관련 하에서 참거짓을 가릴 수 있다. 과학적 판단 요소 2와 철학적 판단 요소 2는 서로 다른 언표지만 진리 의존적으로 동치와 같은 조건이 있을 것이다. 이는 과학적 판단과 철학적 판단 사이에 통약가능성이 있음을 함축한다.

이렇게 참거짓을 가릴 수 있는 체계로 상대주의가 이해된다면, 이론 내재적으로만 참인 입장이라는 해석을 격퇴할 수 있다. 이 기반을 다시 정리하자면

(1) 철학적 명제는 알 수 있다. (회의론 극복)
(2) 철학적 관용에 의한 믿음 귀속은 일차적으로 공존을 우선시한다.
(3) 다른 믿음의 체계에 대한 귀속적 속성은 서로 다른 믿음을 가지게 함을 인정한다. 이 역시 상대적으로 참이라는 전제이며 철학적 판단은 관점적으로 참이다.

이후에 나온 논증은 철학적인 입장이 공존이나 통약가능성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과학적인 직관도 인정할 수 있는 반성적 균형감을 가질 수 있고 자연주의의 강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상대주의로서의 존재 의미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지금으로서는 진도가 안나갔는데, 정대현 교수님이 말씀하신 공치징성에 의한 통약가능성과 흡사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S1] 세계는 과학에 열려있으면서 인문적으로 해석된다(인문적 세계관)
[S2] 세계는 과학자의 편견 없는 객관적 관찰로 구성된 것이다(과학적 세계관)

과 같은 전제는 공존의 기반과 상대적으로 참일 수 있음을 인정하면 가능하다.

S1과 S2의 기반 하에서

[S3] 왜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지붕은 초록색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

[S4] 국회 의사당의 지붕은 구리(Cu) 철판이다.

라고 하는 과학적 믿음에 대해 인정할 수 있다. 심지어는

명제 1. 사람의 본성에 대해 사회생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실 기반이 있다.

라고 하는 명제를 믿는 경우, 행동과학적으로 통약가능하게 안착할 수 있다. 이 경우 현실 기반을 아는 힘은 직관에 의한 것이고, 사회생물학을 배우는 힘은 이성에 의한 것이다. 이를 합리적으로 채택하는 것은 S1과 S2의 인정 하에 가능한 것으로, 상대주의가 인정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 이를 잘 운용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명제 2. 이디푸스는 어머니와 결혼했다
명제 3. 이디푸스는 동물적이다

라는 명제에 대해 참거짓을 가릴 수 있다. 이는 경험에 상대적이며 명제들간의 관련 하에 배제와 채택을 결정할 수 있다. 이러한 기반에서 통약가능한 경우라면 절대적인 체제가 아니더라도 진리 결정에 열려 있다. 상대적으로 옳다고 하는 인정 하에 관점적인 것을 숨기지 않아도 진리 결정이 된다. 진리 결정은 경험에 상대적이어도 건전하며 모든 명제에 대해 같은 믿음이나 결과가 얻어지지 않음을 인정한다.

이는 왜 이디푸스적인 사람에게 행동과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 안에 안착하게 하는지, 그 전제 조건이 된다. 절대적 참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사회생물학을 합리적으로 쓸 수 있는 융통성도 있을 것이고 상대적 참을 인정하므로 열려 있는 태도를 갖는다. 또한 행동과학을 하도록 할 때 그 전제 조건도 된다. 이는 과학과 상대주의가 통약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상상력에 대해서도 인문학은 자유의 확대를 의미할 때, 과학에서 실험 조건의 확대를 의미한다면 자유라는 개념은 공지칭적일 것이다. 이를 발견하는 것은 상대주의적인 융통성 하에서 더욱 쉽게 가능하다.

이번글의 예시는 조금 투박한데 일단 예화적인 것으로 보였다. 후반부에 보인게 조금 서술적이고 투박하지만 현실 기반을 보인 것을 이해하신다면 관용적이다. 헤일즈가 논하는게 읽히면 그때가서 더 합리적으로 긴밀하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기조는 이렇다고 보였다.

Author: Jae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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