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밖에 나가 체험주의 저서를 읽고 왔다. 칸트가 제안한 순수 이성과 경험의 분리에 대해 비판한 대목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프레게가 해석되는 한 방식 즉 뜻과 지시체를 구분한 것에 대해서 흡사한 논지로 비판하는 대목도 읽었다. 마크 존슨은 이성과 경험의 분리가 뜻과 지시체의 분리에서도 구조적으로 같은 결과로 이어진다는데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고 있다. 이성의 사용과 경험이 서로 다르면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 해석 시도가 있지만, 마크 존슨의 비판점은 칸트가 순수 이성을 개념적으로 분리시켰다고 해도 이를 해석하는 사용 방식은 다양하고 경험과 이성 그 둘이 영원히 분리된채로 남아 있게 된다는 해석도 있게 된다는데 있다. 이것이 전제하고 있는 논거적 기반을 비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칸트의 동기는 체험주의의 경험의 강조에 반대되는 것만은 아니다. 칸트의 분리는 개념적인 토대 구조를 만드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크 존슨의 의의는 나도 찬성하는데 칸트를 사용하는 사용 방식에 의하면 철저하게 분리시키는 경우가 있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다. 프레게를 비판한 것 또한 흡사한 개념 구별의 사용 방식이 근거로 하는 것에 주목해서다. 프레게를 철저하게 따르면 이성과 경험의 구분이 지닌 칸트 해석 구조와 같은 결과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프레게가 한대로 수학적인 지시성을 강조하면 지시성의 객관성은 얻어지지만, 수학 외적인 각자의 경험을 누락시키는 해석이 되서 문제가 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이론 지향적인 것을 확보하기 위해 경험을 누락시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사람다워야 한다는 칸트의 윤리학은 찬성할 수 있어도 사용 방식으로서의 최고선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같다. 이론 지향적으로 단순성을 추구하더라도 이 시도들에는 경험 지향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 독립적인 대상 또한 경험에 의해 동기가 주어진다. 이성은 경험적이다.
나는 마크 존슨이 말하는 것, 이성과 경험을 너무 예리하게 늘 구분한다면 기호에 체험이 유폐된다는 비판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비판점을 이해할 수 있다. 기호의 사용을 경험을 일부러 배제하지 말고 쓰자는 것이 핵심 논지로 칸트와 프레게를 비판한다. 감응력과 자발성, 사유에 심리적 경험이 유입되면 안된다는 논제들이 이해되는 수 많은 방식들 중에서 유난히 경험을 배제하는 논리가 있을 때 그 논거인 칸트와 프레게를 비판해야 되는 것이 동기다.
나는 칸트-프레게 전통을 의미론적 기반 제시에 있다고 보고, 그라이스와 같은 자비 원리적인 가능 근거로 쓴다면 마크 존슨의 비판이 지향하는 것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한 첫 시도는 이론의 제시가 분류적이라는데서 시도될 수 있는 것 같다.
칸트의 경우 개념적 분류를 위함인데 그는 종합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분류 이상의 무엇, 즉 논지를 이행해가는 것 이상의 무엇 즉 철저한 개념 구분으로 이어지면 그 개념 구분이 언표되는 방식의 이점에 비해 난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호에 체험이 유폐되는 면이 있다. 최고선 비판도 그 예인데 이는 개념 구분이 해내는 철저한 기호의 외연에 의해 전달되는 의미와, 기호에 선행하는 경험이 기호로부터 분리되는 현상을 의도한 특권적 사용 방식도 있고 이를 프레게주의로 이어받으면 뜻과 지시체, 사상과 같은 언어의 이해를 너무나도 예리하게 구분해서 칸트에서와 같은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비판한다. 뜻의 발생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이를 인정한 조건에서도 의미 전달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의의는 보편적인 이성으로 합리적인 사유를 하는 토대가 되지만 바로 그 합리성과 보편성이 도리어 체험을 유폐시키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난 칸트의 이성/경험 구분과 프레게의 뜻/지시체/사상의 구분은 딱 떨어지는 규범적인 구분이 아니라 분류적 구분으로 본다. 논증적으로 자신이 사고한 것을 보여주는 참고 대상이며 (reference) 이는 통용되는 개념이 존재할 때 논자가 스스로 사유를 전개하는 질료서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도 표현의 외연은 고정적이지만 이해 구조는 은유라는데서 해석이 된다. 마크 존슨이 경험을 보존하려고 하는 이유인 기호 사용의 투명성은 기존 체계에서도 이어갈 수 있는 방식이 있는 것 같다. 은유를 인정해도 투명함이 보존되는 방식이 있다. 지금은 그저 표현으로 보이고 있지만, 칸트와 프레게의 전통에서도 경험을 중요하게 이어가는 방식들이 있다. 의미론적이면서 그 의미 이해를 언표자가 처한 경험적 조건에서 살피자는 시도들이 있다. 예컨데
그는 홍역을 치르고 있다
라는 말에 대해 연구한 그라이스의 자비 원리가 대표적이고, 헤일즈의 상대주의가 그러하다. 이들 입장은 의미를 결정할 때 사람의 관점적인 것을 중요하게 존중하면서도 의미를 표현할 때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표현하지 않음을 인정하면서 주관적 경험이 인정되는 이해 구조를 살핀다. 이를 잘 살펴본다면 마크 존슨의 비판 의의를 살리고, 어떤 것이 칸트-프레게를 받아들일 때 체험주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규범적인 구분보다 뜻의 구분을 우선해서 의미 규범을 재정의한다.
이 재정의에 의하면 프레게가 뜻보다 지시체나 논리적, 추상적인 선험성을 우위로 둔 것이 이해되는데 그가 수학적인 지시성을 의도했기 때문에 다름이 있게 된다고 본다. 프레게는 기호에 뜻과 같은 상상력의 대상을 끼어들게 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경험 영역을 구분하면 체험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 이때의 경험 영역은 수학이고, 체험주의의 경험 영역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언어 생활과, 과학에서도 보여지는 상상력 허용 문맥의 경험 영역이므로 다르기 때문에 양립할 수 있다. 프레게가 뜻과 지시체에 대해 논의한 논문에서 그는 뜻이라는 의미론적인 대상에 대해 말살하자는 주장은 안한다.
그러나 개념의 규범적 일관성을 지킨다면 프로젝트의 시작이 수학적 기호의 의미론이라, 수학에 대해 심리적으로 의미를 주어지게 하면 안된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의 경험 영역은 수학이므로 이를 동의하는 사람은 그 의의를 인정한다.
이런 경험 영역의 구분에 의하면 그가 제시한 뜻이라는 의미 작용이 분명히 언어 이해 구조의 한 방식이므로 배제하지 않고 뜻의 의의를 살려내면, 마크 존슨이 보존하려고 한 경험성을 지지하면서, 비판을 받아들여 재정의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뜻은 외연을 넘어선 상상력의 긍정이며 상상력은 각자의 경험에 의해 이루어지는 활동이므로 체화된 마음이다. 수학을 공부한 사람도 늘 경험 독립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므로 공동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험 영역의 관점에서 경험을 우선하기도 한다.
오랜 옛날의 해석 방식은 아직도 존재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각자의 경험 영역이 의미 이해에 갖는 차이를 잘 드러내준다. 30년전에는 누군가
컴퓨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라는 언명에 대해
(1) 컴퓨터는 정확한 업무 수행을 한다
라고 이해할 수도 있었다. 이는 IT 기술자들은 그 내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사람들이 알게 된 상식은
(2) 프로그래머가 악의를 품으면 컴퓨터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컴퓨터”, “거짓말”, “안함”과 같은 표현들은 외연은 고정되지만 각자의 경험에 의해 달리 이해된다. 즉 해커가 이해하는 방식, 보안 전문가가 이해하는 방식, 컴퓨터를 처음 접한 사람이 이해하는 방식은 다른데 그 외연은 하나다. 이 외연과 이해 구조의 상이성은 은유라는 이해 구조에서 찾아진 것으로
(3) 바이러스에 걸려서 컴퓨터가 고장났는데 봐주시겠어요?
라고 말한 사람의 컴퓨터가 진짜로 바이러스에 걸린게 아니더라도 양해되는데 이는 은유라는 이해 구조에 의한다. 누군가 골탕을 먹이려고 한 것이어도 양해된다. 그라이스가 말하는 자비 원리와도 통한다. 이는 칸트와 프레게의 전통에서 구문적인 분석과 의미 분석이 실현될 수 있는 전통에서도 마크 존슨의 제안이 성립하는 근거가 될 것이다. 기호가 은유적이므로 경험에 대한 유폐를 막는다. 이 이해 구조는 경험 영역을 알면 이해가 된다.
이런 정도의 사고 기조만 있다. 인용한 논문들을 살피면 개념적 사용이 보다 더 윤택해질텐데 일단 내가 알고 있던 것을 토대로 살펴봤다. 프레게의 뜻과 지시체 구분에 대해 나름대로 논문도 읽어본적이 있고 문헌 탐구도 해봤으나 다시 찾아서 체험주의 문맥에 대응되는 사유를 해봐야겠다. 이번 글은 길게 의미가 전달되게는 썼는데 아직도 개념적인 것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후속적으로 보완이 필요하다. 체험주의 저서를 아직은 서두 십수페이지만 읽어서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