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주의는 인지과학을 지지하는 철학 체계다. 인지과학이 논의하는 뇌의 기능과, 의사소통이 기호의 매개를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발견, 인간종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기호적 층위의 논의를 한다.
우선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이라면 우리는 신체를 토대로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들은 타인의 신체에는 직접적인 지각이 불가능한 구조에서 살아간다. 뇌의 경우에도 뇌가 회백질로 이루어져 있고 시냅스들의 연결에 의해 전기화학적인 신호를 주고 받으면서 의식이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는데 대부분의 기저 작용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기도 하다. 우리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할때 기호의 매개를 받는다. 뇌의 구조를 이루는 회백질도 회백질이라는 언어 기호에 의해 기술되고 인식된다. 우리가 연애를 하거나 토론을 할때도 각자가 조금씩 다른 경험 내용을 특정한 논증 표현에 사상시켜 말을 하지만, 합의가 되더라도 각자의 실천의 향방은 다르다.
언어라는 기호 체계나 세상의 여러 매개물들은 우리의 은유와 추론이라는 인식 구조에 따라 성립한다. 뜰 앞의 나무를 바라볼때도, 우리는 소나무의 기개를 떠올리면서 애국가의 한 소절을 떠올리기도 하고 어느 초등학교 학생은 너의 꿈을 나무로 선택하지 말라고 할때도 꿈나무를 의식하고 나무를 선택하기도 한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는 언어에 대해서도 조금씩 다른 실천으로 이어진다. 물리주의라는 말에 대해서도 환원주의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비환원주의로 이해하거나 창발론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는 기호에 대한 외연이 우리가 지각하는 통로지만, 이 외연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다차사상적인 것에 의해 각자가 조금씩 다르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나무에 대해 꿈나무로 이해하고 자신의 상징으로 선택한 경우에 나무가 지닌 길쭉한 모양과 특정한 인생의 제한이 겹치면 어떻게 느낄 것인가?
라캉주의와 같은 이론 체계에 의해 데인 경우에는 나무라는 평범한 사물이 데인 사람을 기호에 유폐시키는 것이 된다. 이 경우에 기호에 체험이 유폐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신경체계는 복잡한 체계이고 이 사람의 직접적 지각 체계는 다른 존재와 완전하게 공유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각자의 몸 안에 유폐되어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존재인 것이다. 흄으로 돌아가보면 흄은 우리의 지각이 인상에 근거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일견 옳은 논의지만, 이론이 되려면 단순히 선명한가 흐린가에 의해 결정이 될수가 없다. 자아, 실체, 인과성과 같은 것이 가능하려면 각자의 체험이 유폐된 것을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이를 경험의 유폐성이라고 한다면, 체험주의는 왜 구명(rescue)을 의도하면서 우리는 각자의 몸 안에 유폐되어있다고 할까?
내 견해는 이렇다. 개인의 체험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의식 현상이다. 자아가 손상되어 자기가 잘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의식 현상이라는 기호가 된다. 체험주의는 이러한 현상 연구에서 탈유폐해주는 것에 관심을 두는 학설이다. 탈유폐라는 의식 현상에 대해 극복을 한다고 할때 우리는 우선 개인의 체험이 기호에 유폐된 것을 전제로 하고 있고 이 경우에도 언어나 현상, 표정, 관찰 등의 매개에 의해 지각된다. 철학에서 보여지는 촌철살인의 문장, 친구들의 상담들도 우리가 각자의 몸 안에 유폐되어 있는 존재지만, 각자가 유폐된 것을 탈유폐시켜주는 실천이다. 체험주의가 말하는 우리가 신경체계로 구성되어 있고 각자의 몸 안에 유폐되어 있지만, 이를 탈유폐하면서 삶 속에서 유폐와 탈유폐를 지향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가 된다. 각자가 몸에 유폐되어 있는 조건을 인간종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발현이 안된 차이일뿐, 유폐와 탈유폐가 동시에 담지되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생각해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