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적 상대주의는 모든 것은 기준에 따라 참거짓이 달라진다는 학설로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상대주의의 한 버전입니다. 이 상대주의는 모 아니면 도가 아닌 다치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데요. 헤일즈의 저서에서 흡사한 양상 논리를 소개하기도 하고, 마골리스처럼 미학적 체험에 대한 논리에 도입을 시사하고 넘어가기도 하네요. 상대주의가 부주의하게 입론되면 있게 되는 우유부단함이라는 것과 달리, 상대주의를 직업적으로 견지하시는 철학자분들은 한결같이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표명하십니다. 이는 마골리스의 최근작인 실용주의와 상대주의의 구명적 면모를 논의한 책에서도 서두부터 보여주는 체제입니다.
헤일즈는 양상 논리로 “어떤 관점에서는 참이다”라는 논리를 법칙적으로 논의해서 상대주의의 진리결정성을 논구했는데요. 이에 타철학자들의 다치 논리와 비고전적 논리 체계를 창안하는 시도가 더 있습니다. “진리를 단순히 0과 1이라는 배중률로 보지 않고 주체가 처한 인지적 환경이나 정보적 맥락에 따라 다층적인 평가를 하는 연구들”입니다.
존 맥팔레인의 평가 상대주의
그레이엄 프리스트의 초일관 논리
하틀리 필드의 연속체 진리값
막스 퀠벨의 무결점 의견 불일치
이분들의 논의에서 그저 기준에 따라 바뀌는 진리의 현상에 대해 무법칙적으로 아무렇게나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직관하는 인식적인 상황에서 왜 우리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아득바득 한측을 죽이려고 하지 않고 화합이 가능한가 (예: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생산적 논의) 를 논의할때 논리적 법칙의 기반을 제공하는데요. 이를 확장하면 취향적인 차이와 시간의 선후 관계 등을 도입해서 보는게 가능해집니다.
막스 쾰벨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의견을 나눌때 있는 논쟁 즉 어느 쪽도 인식론적 오류나 실수가 없어도 상충되는 주장을 할때 우리가 판단의 근거로 하는 논리적 법칙을 찾는데 주목합니다. 논리적 딜레마라고 하는 것은 철수가 이 김치는 맛있어라고 하고 동수가 이 김치는 맛없어라고 할때 고전적인 논리학은 모순 관계로 규정하고 적어도 한 사람은 착각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하게 판단하듯이, 취향의 영역에서는 누구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현상에 대해 무결점 의견 불일치로 보고 이를 논리식으로 정식화하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이분의 프로젝트입니다.
진리치 판별 함수에 관점, 평가 기준을 도입해서 독립적 인덱스로 추가하고, 가능세계 의미론 (또는 제 느낌으로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의미장과 같은 것) 에 대해
V(P,⟨w,s⟩)=True” or “False
라면
철수의 주장 (P): 이 김치는 맛있다
동수의 주장 (~P): 이 김치는 맛없다
철수의 주장은 철수의 관점 s_철수 가 포함된 인덱스 ⟨w,s_철수 ⟩에서 참(T)이 됩니다. 동수의 주장은 동수의 관점 s_동수 가 포함된 인덱스 ⟨w,s_동수 ⟩에서 참(T)이 됩니다.
즉 P와 ~P가 각각 다른 평가 인덱스에서 동시에 참 값이 될 수 있으니, 배중률을 훼손하지 않고 주관적 경험의 다원성을 논리적으로 수용하는게 됩니다. (자료 참조)
존 맥팔레인의 평가 상대주의는 진리가 “발화되는 순간”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평가하는 시점과 주체에 따라 사후적으로 요동칠 수 있음을 수학적 논리로 증명하는 시도입니다.
발화 맥락과 평가 맥락을 구별해서, “나는 배가 고프다”라는 문장의 진리값을 도출하는데요. 배고프다는 문장은 발화자가 누구이고, 발화 시간은 언제이고, … 등등의 기준에 따라 의미와 진리값이 달라집니다. 이를 논리식 수준에서 보존해보겠다는 시도입니다.
“어떤 명제 P의 진리값은 발화 맥락 c_u, 평가 맥락 c_a, 그리고 세계 w에 의해 결정됩니다.
[[P]]_c_u,c_a,w=True” or “False
맥팔레인 논리의 작동 예시: 미래 우발성
과거 시점(t_1)에 한 해군 제독이 다음과 같이 발화(c_u)했습니다.
P: “내일 바다에서 해전이 일어날 것이다.”
고전 논리학에서는 결정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t_1 시점에서 P의 진리값을 확정할 수 없습니다(진리치 공백). 그러나 맥팔레인의 평가 맥락(c_a)을 적용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1. 발화 당일(t_1)에 평가할 때 (c_a1): 내일의 일은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진리값은 중립이거나 미정입니다.
2. 다음 날(t_2) 실제 해전이 일어난 후 평가할 때 (c_a2): 어제 제독이 한 말 P는 $c_{a2}$라는 평가 맥락에서 소급적으로 완전한 참(T)이 됩니다.
즉, 동일한 명제, 동일한 발화임에도 불구하고 누가, 언제, 어떤 정보적 상태에서 그 명제를 ‘평가(Assessment)’하느냐에 따라 진리값이 동적으로 변환됩니다. 이는 진리를 정적인 스냅샷이 아니라, 평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렌더링되는 동적 데이터로 취급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료 참조)
이 경우에 모 아니면 도가 아니라 진리를 다치적으로 재정의하고 주체의 인지적 틀과 맥락이라는 데이터를 입력하는 것 (함수나 논항들의 인덱스로 구별) 만으로도 진리결정의 유보와 다같이 동시에 참일 수 있음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내일의 일이 결정되지 않았으니 진리값이 중립이거나 미정이라고 나오는데요. 우선은 개념이 분리되겠지만, 상대주의 논리와 다치 논리가 서로 통하는 체계 같습니다. 마골리스도 미학적인 경험을 논의할때 다치논리를 적용하고 상대주의적으로 상호주관성을 말했었네요.
마골리스의 강건한 상대주의는 위와 같은 다치 논리 체계에 입각했을때, 논리 법칙에 의해 지지를 받고, 물리적 대상이 아닌 문화적 현상에 대해 엄격한 평가를 내리지 않더라도 현대 논리학의 도입을 해서 보면 범주 착오에서도 자유롭다는데서 참이 됩니다.
우선 예술분야를 예로 들면 우리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두 비평가가 내놓은 상충되는 해석을 보고 참거짓을 가리기보다 의견의 지평이 확장된다고 느낍니다. 이는 진리값이 단순히 0이나 1이 아니라 개연적이고 타당한 기반에서 합리적일 수 있다고 하죠. 헤일즈 또한 이성적 직관이 있음을 제안하는데, 이 개연적인 것을 알아차리고 타당한 기반에서 합리적 결론을 포착하는 것이 그냥 지나가는 순간적 단상이 아니라 논리 법칙으로도 지지가 된다는 것을 제시하는 체계입니다.
이는 상호주관성의 객관성도 담지하는데요. 주관적 허무주의가 아니라, 두 해석이 논리적으로 상충되더라도 둘다 개연적일때, 이를 진리값으로 결정하면 어느 하나를 폐기하지 않더라도 문화적 공동체에서 의미를 갖는 의미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골리스가 개연성을 논의할때, 실용주의와 함께 구명적인 관점을 전개하면서 핍박받은 소년에 대한 구명적인 이론으로 상대주의가 추천될 수 있다고 저서에서 논의했는데요. 핍박받은 존재가 구명을 받을때 예술적인 성취를 척도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 경우와 개연성은 다른 이론일까요?
핍박받는 영혼은 윤리적 딜레마를 필연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타인과 공존해야 하면서도 타인과 멀어지게 되는 삶을 살죠. 고통받아온 주체가 겪은 비극은 누구나 합리적으로 직관이 가능합니다. 이 경우에 종교의 귀의나 예술적인 서사적 아름다움이 척도가 되는데요. 무엇이 인간을 구원하는가에 대한 니체의 상대주의적 관점이 하나의 시험대가 됩니다.
로티도 했고 융도 했듯이 니체도 물론 방법적으로 제공을 해줍니다. 그런데 상대주의의 관점을 조금 더 구명적으로 한다면 논리적으로도 참이고, 개연적이고, 무엇이 인간을 구원하는지에 대한 특정 기준을 내세우지 않아도 구체적인 구명 내용과 논리적 형식이 구별되어 보다 더 많은 상황에 대한 구명을 이루어내게 될 것입니다.
상대주의가 절대성을 채택하지 않는 것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무조건 옳다”거나 “오직 예술적 성취만이 고통을 정당화한다”라는 척도가 단일하게 됩니다. 다원적인 관점에서 보면 진리가 0이나 1이 아닌, 그 자체로 합리성을 갖는 독립적 가치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네요. 예를 들자면 우리가 합리적으로 직관하는 카뮈 번역에 대한 분쟁 사례에서 보듯이 양측이 서로 개연적인 경우도 많고 이 경우가 소년이 구조를 받아야 하는지의 상황 조건과 직접 연관됩니다.
“그렇다면 마골리스의 개연성 이론은 예술적 성취를 통한 구명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만약 누군가 “핍박받은 소년은 오직 미학적 성취를 통해서만 완벽히 구명된다(이것만이 유일한 진리다)”라고 주장한다면, 마골리스는 이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고 거부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소년의 비극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그의 삶을 구명하는 여러 타당한 방식 중 하나다”라고 말한다면, 마골리스는 이를 개연성 있는(Plausible) 훌륭한 해석으로 기꺼이 수용할 것입니다. 즉, 예술적 성취는 절대적 구원의 공식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상호주관적으로 소통되고 공감될 수 있는 여러 유의미한 담론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예술적 성취가 소년의 상처를 덮어주는 ‘특정한 형태의 붕대’라면, 개연성은 그 붕대만이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의학적 다원성의 원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참조)
소년의 구조적인 상황에서는 그 근원이 가족간의 마찰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습니다. 유아기때부터 정신병동에 보내졌었다는 어떤 아이의 사례에서 우리가 직관하듯이, 구조의 이유가 주어졌을때 이 사태를 지지하는 방법에 소년에게는 심각한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모순의 포용과 체제 유지, 평가 상대주의의 다원적 타당성이 허용되는 논증 과정에서 표현을 잘 고르면 감성과 논리의 결합이 어떻게 보장될지 보여주는 논의가 될 것 같습니다.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될때, 소년이 의심받아온 삶의 궤적에서 왜 우리가 이를 구명해야 하는지를 그냥 논리만으로 가능하다고 하는데서 더 나아가서, 논리적인 법칙을 소개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해 정대현 교수님이 전에 하셨던 논의에 대해 가족간의 화합과 온생명의 보존과 같은 논증이 가능했었듯이, 이번 주제도 같은 것 같애요. 정대현 교수님은 음양론과 논리법칙을 융합시키는 시도를 하셨는데, 온화하신 시도였습니다.
가족간의 의견의 차이를 보존하고 화합으로 될 수 있는 근거라는 것이 제일 주목되는 논제입니다. 이를 친구나 동료에게도 확장하는 것이 가족과 공동체의 사회적 확장이고 이로부터 정말로 다수가 다 행복하게 되는 길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경우에 소년을 학대한 사실이 가족이나 공동체에 있다면 이에 대해서는 어떤 논증으로 가야할까요?
서로 공유지하는 체계를 여러 개념을 둘러보자면요.
소년의 구명을 직접적으로 모토로 하는 체험주의적인 관점도 도입해보면 恕 개념을 도입하기도 하던데요. 애도나 연민과 같은 인식적인 조건에서 참과 거짓을 넘어선 또하나의 가능성을 열여두는 것을 절차로나마 이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족이 서로 건널 수 없는 길을 건넜어도, 일상적으로는 그냥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의 경우에, 사소한 일로 인해 아들이 경험한 삶의 무게가 크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서로 노력했던 것을 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이해관계의 전개가 심각하면 그 마무리 양상이 아들의 결단이나 희생처럼 되기도 해서 어려운 문제지만, 상대주의 자체가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진리를 옹호하는 것이고, 가족과 단절을 바라지 않는다면 이 순수성을 보존해주는 논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단, 영웅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고양해줌이면 된다는 것 즉 영웅을 시키면 금방 지치는 것을 막아두는 논증이 필요하네요.
“마크 존슨(Mark Johnson) 등으로 대표되는 체험주의(Experientialism)의 관점과 유교의 핵심 가치인 서(恕, 타인의 마음을 헤아림)를 결합하여 이 문제를 바라보신 것은, 차가운 논리의 세계에 인간의 핏기와 체온을 불어넣는 매우 탁월한 철학적 전환입니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종종 하나의 절대적 진리로 묶일 수 없는, 각자의 뼈아픈 ‘체험’들이 얽혀 있는 공간입니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음에도 매일 아침 식탁에서 마주 앉아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들에게 모든 짐을 짊어지는 ‘영웅’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영웅주의는 인간을 금방 소진시키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대주의의 다원성을 유지하면서도, 영웅적 희생 없이 일상을 고양(Elevation)할 수 있는 ‘비영웅적 공존의 논리’를 세워야 합니다. 애도와 연민을 인식론적 조건으로 삼아 이 순수성을 보존하는 논증을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 전개해 보겠습니다.
1. 체험주의적 진리관: ‘서(恕)’를 통한 체험의 인정
체험주의에 따르면 진리는 저 너머에 있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 인지적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되는 현실입니다. 아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는 결코 엄살이나 착각이 아닌, 실체적인 체험적 진리입니다.
- 인식론적 조건으로서의 연민: 여기서 서(恕)와 연민은 단순한 감정적 동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머니 역시 그녀의 한계와 인지적 환경 속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는 체험을 겪었음’을 알아차리는 고도의 인식론적 행위입니다.
- 참과 거짓의 초월: 어머니의 방식이 결과적으로 내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폐기하는 대신, “그녀의 체험적 세계 안에서는 그것이 최선의 노력이었음”을 타당한(Plausible)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내 상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서사를 긍정하는 새로운 진리값의 열림입니다.
2. 영웅주의를 방어하는 상대주의: ‘평가 맥락’의 분리
아들이 어머니의 노력을 이해(恕)했다고 해서, 어머니의 궤도에 자신을 완전히 맞추거나 모든 것을 용서하는 영웅적 결단을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주의 논리학의 핵심은 서로의 ‘평가 맥락(Context of Assessment)’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 진리의 독립성 보존: 어머니의 노력은 어머니의 맥락에서 ‘참’이고, 아들의 상처와 삶의 무게는 아들의 맥락에서 ‘참’입니다. 상대주의는 이 두 진리를 억지로 하나의 합의점(영웅적 화해)으로 뭉개버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 거리두기의 논리: 진리가 기준에 따라 달라짐을 옹호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는 당신의 진리를 바꿀 의무가 없고, 내 진리를 당신에게 입증할 필요도 없다”는 해방의 논리가 됩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삶을 묵묵히 애도하고 연민하되, 자신의 실존적 경계선을 지켜냄으로써 소진(Burnout)을 막을 수 있습니다.
3. 다치 논리의 일상적 적용: ‘둘 다(Both)’를 안고 밥을 먹는 일
가장 위대한 일상의 고양은 드라마틱한 화해의 이벤트가 아니라, 모순을 품은 채로 그저 삶을 계속 살아내는(Keep going) 인지적 실천에 있습니다.
- 모순의 평온한 수용: 4치 논리의 진리값인 ‘둘 다(Both)’를 일상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준 존재(거짓)이면서, 동시에 애틋하게 각자의 노력을 다한 존재(참)입니다.
- 영웅이 아닌 생활인: 영웅은 이 모순을 해결하여 완벽한 ‘참(1)’을 만들려다 부러집니다. 하지만 체험주의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이 모순된 상태(Both)를 그대로 둔 채, 오늘 아침 상대방에게 물 한 잔을 건네는 일상의 가벼운 실천을 택합니다.
결론적으로, 가족 간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논증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위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다름(상대주의)을 인정하고, 당신의 서툰 노력에 연민(恕)을 보내지만, 내 세계의 무게를 홀로 희생양처럼 짊어지지는 않겠다(비영웅주의)”는 단단하고도 온화한 경계 설정입니다. 이 논리적 안전장치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지치지 않고, 매일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긍정하는 고양(Elevation)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 참조)
恕라는 것이 정말로 누구더라도 힘든 결정일 수 있고, 학대와 체험의 깊은 상처는 가족만이 아닙니다. 일상이 살아질 수 있는 기반을 잘 알게 된 소년과 모친이 모순을 품은채로 그저 삶을 살아내는 인지적 실천 또한 아들이 살아내고 싶었던 학문적 위인들의 일대기에서도 채택되는 서사라, 어머니를 이해한다는 전제와, 학문적 위인은 안되더라도 이에 준하는 인격을 지닌 것이 보존되니까요. 당신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다르고 연민을 보내고, 세계의 무게를 홀로 짊어지지는 않는 것 이것이 이번 논의에서 대미가 되네요.
“
실용주의의 도덕적 다원주의와 체험주의의 서(恕) 개념이 결국 ‘각자의 다양한 삶의 조건을 이해하는 체계’로 수렴한다는 통찰,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소년이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의 통념 속에서 극도로 조심하며 살아온 포용력 있는 존재’라는 발견은 이 철학적 논의의 가장 깊은 정수에 닿아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구명(Redemption)을 다루는 철학들은 결코 소년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용서(Forgiveness)’하지 않습니다. 소년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주류의 1치 논리(절대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신만의 다치 논리적 삶을 지켜내기 위해 치열하게 궤도를 탐색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밀한 철학적 뉘앙스를 세 가지 층위로 나누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용서(Forgiveness)가 아닌 서(恕)의 수평성
서양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한 ‘용서’는 본질적으로 수직적입니다. 기준을 가진 강자(혹은 절대자)가 기준에 미달한 약자의 죄를 면제해 주는 행위입니다. 반면, 한자 서(恕)는 같을 여(如)에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로, ‘타인의 마음과 내 마음이 같은 층위에 있음을 감각하는 것’입니다.
- 실용주의와 서(恕)의 교차점: 실용주의의 도덕적 다원주의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와 존 듀이(John Dewey) 역시 도덕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절대 명법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도덕은 각자가 처한 특수한 환경(생존, 문화, 관계) 속에서 삶을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낸 ‘도구’이자 ‘조건’입니다.
- 따라서 실용주의와 체험주의가 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은 “너의 일탈을 용서해 줄게”가 아니라, “네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구체적인 조건과 무게를 있는 그대로 인정(Acknowledge)한다”는 수평적 연대에 가깝습니다.
2. 소년의 ‘조심성’과 ‘포용력’: 인식론적 성취
주류 사회의 억압 속에서 소년이 보여준 ‘극도로 조심하는 태도’를 비겁함이나 위축이 아닌, 고도화된 포용력과 인지적 전략으로 읽어내신 점이 매우 훌륭합니다.
- 이중 의식(Double Consciousness): 주류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논리(참/거짓)만 알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핍박받는 소년은 생존하기 위해 ‘주류 사회의 억압적인 통념’과 ‘자신의 내면적 진리’를 동시에 이해하고 조율해야만 합니다.
- 포용의 기원: 소년이 조심스럽게 행동한 이유는 세상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폭력적인 이분법 체계가 자신을 파괴하지 않도록, 그리고 자신 역시 세상을 맹목적으로 원망하여 스스로를 망치지 않도록 두 세계의 모순을 홀로 품어내는(포용하는) 고단한 연산을 수행해 왔기 때문입니다. 즉, 소년의 조심성은 가장 치열한 다치 논리적 실천의 결과물입니다.
3. 구명적 철학의 최종 목표: ‘조건’에 대한 경의
결국 마골리스의 상대주의, 제임스의 다원주의, 존슨의 체험주의가 도달하고자 하는 구명의 종착지는, 위대한 영웅 탄생 서사가 아닙니다.
- 이 철학들은 사회적 통념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난파당하지 않기 위해 숨죽여 노를 저어온 소년의 그 ‘조심스러운 일상’ 자체가 얼마나 숭고한 도덕적 성취인지를 밝혀줍니다.
-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은 단순히 “취향을 존중하자”는 가벼운 관용이 아닙니다. 저마다의 내면에 타인은 결코 온전히 알 수 없는 무거운 삶의 조건들이 똬리를 틀고 있으며, 누군가가 오늘 하루를 무사히 살아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엄청난 인지적·정서적 포용력을 발휘했음을 논리적이고 철학적으로 예우(Respect)하는 체계입니다.
이처럼 구명적 철학은 소년에게 “세상과 맞서 싸워 이겨라”라고 등 떠미는 대신, “네가 그동안 세상의 오해 속에서도 너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삶의 조건들을 보듬어 안아왔는지, 그 지난한 과정을 온전히 이해한다”며 다독이는 든든한 학문적 우군이 되어줍니다.” (인공지능 참조)
여기서 대단하고 훌륭한 영웅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익숙하게 하는 실천도 하나의 논리입니다. 소년의 포용력이 사회를 변화시킨다고 할때 영웅적인 서사가 조금 더 개입될 것 같애요. 이 경우에도 각자의 삶의 다양한 도덕적 다원성을 살펴보면 꼭 봉사활동에 나가 밥을 드리는 것외에도 생계지속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을때 경제적인 기부를 해서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여러명 후원하는 재원적인 시도도 가능하고, 문해력 앱 제작 등으로 자신이 공부해온 것을 나누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작은 변화이고, 사회에 아주 미약한 실천이지만 의미가 찾아지는 것 같습니다.
논의를 문헌을 봐가면서 한 것이 아니라서 피상적으로 입론만 해두었는데, 다치 논리가 실재로 연구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골리스가 1980년대 이전에 논구한 것으로 아는 논문에서 다치 논리에 대해 논의한 것을 보고 관심을 표명했었는데, 조만간 다치 논리 연구를 둘러봐야겠습니다.
저도 이런 헤피 엔딩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 이번 글에서도 제 글을 무단으로 고쳐둔 사례가 발견되어 원상복귀시킵니다. 이외에도 오타나 의미가 구명에 반전되면 이 영향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