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학파가 말하는 꿈과 상징, 인간의 의식

융의 인간과 상징 앞부분에 나온 융이 직접 해설한 논문을 읽고 있다. 융이 말하는 무의식과 그 치유적인 원리가 나와있다. 프로이트와의 차이점도 융 자신이 직접 해설한다. 이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남성들을 구명한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르는데 프롬도 프로이트를 비판한 것을 본다면 이해가 된다. 융은 아니마 아니무스의 관점에서 남자의 꿈에 나온 여성이 그 남자의 신사적인 자각의 무의식적 발현이라고 보는 것 같다. 즉 그 남성이 자신을 신사로 규정하지만 때로는 그의 무의식에 아니마적인 요소 즉 여성적 요소가 있음을 자각한 어떤 삶에서의 체험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 같고, 이런 자기 아닌 요소가 누구에게나 형성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 같다. 꿈에 나온 헝크러진 여성은 그 남성의 부인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꿈에서 나온 여성상이나 뭔가 내려치는 것, 문에 열쇠를 꽂는 것에 대해 성적인 콤플렉스로 봤는데 융은 콤플렉스인 경우도 있을 것 같다고 하지만, 불필요한 의심을 생각해서 약간 다른 진단을 내리는 것 같다. 자기 아닌 무엇은 심해지면 만성 콤플렉스가 되고 이는 사회적으로 다른 국면의 성격처럼도 고착화된다. 페르조나라고 하는 것, 그것은 사실 사회 생활을 할 때 주어진 역할인데 생활 속에서 주어진 체험들은 자기가 평소에 자각하지 못하던 인식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게 되고 그러한 것들이 도덕적이거나 규칙 준수적인 면에서 의식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을 때 꿈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 같다. 즉 남성은 남성다워야 한다는 것, 살아가면서 신사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 때로는 일탈하고 싶은 연약함을 느끼는 무의식이 꿈에서 헝크러진 여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해 “소아성애가 왜 문제인가? 문제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신 블로그 이웃분의 분석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즉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것의 왜곡된 현실이 그 아이에게 언어적 고착을 불러온다는 것과 같다.

망각에 대해서도 그는 창조력의 한 원천이 무의식적 기억에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묘사한 장면이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를 집필하기 전에 출간된 책에서 이미 묘사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그가 이 책을 읽었거나 적어도 같은 서사에 대한 인식이 전에 있었던게 저술에 나타난다고 하는 고증을 하는데 이는 요즘 불거지는 예술적인 표절 사태에 대한 이해의 한 사례라고 봐도 될 것이다. 만성 콤플렉스가 주제가 되면 이에 대해 프로이트처럼 성적인 측면의 승화라고 볼테지만, 이는 성적인 것과 다르게, 단지 현실에서 주어진 그의 사회적 위치에 의해 발현이 안된 창조력이 발현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사티로스 같은 형상에 대해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보다, 신화적 관점에서 공유된 상징에 대한 해석의 지평이 열리길 융은 기대한 것 같다.

이는 창조력이라는 측면에서 과학자들의 발견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에 의해 모티브를 얻었다는 일대기 회상적인 극화적 요소에서도 발견되는데 실재로 꿈이 현실에서 무의식의 영역에서만 인식되는 것, 그러한 것이 나타난 현상으로 창조적 영감을 주는 것에 대해 선명하게 논구한 사례 같다. 니체도 저술에서 말하지만 그가 성적인 것을 모티브로 도입한 사카이엔 축제나 사티로스 같은 형상도 융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성적인 콤플렉스의 발현이기보다, 의식이 주목하는 것 외적인 예술적, 자연과학적 창조력이 그 꿈을 꾼 사람의 내면에 존재해서, 보다 더 창조적인 인간 능력의 극대화에 조력이 된다는 것 같다. 융은 벤젠 연구나 수학 연구를 했던 학자들의 일화를 언급하고 있다.

다시말해 자유로운 연상이 일어나는 꿈의 영역은 때로는 발견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신화적 상징으로, 문화적 유사성으로도 읽히는 집단 무의식의 영향 하에 개인들의 의식 이전의 무엇이 규정되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나타나는 일관된 원리가 있음을 의미한다고 느꼈다. 융은 이를 꿈에 나오는 상징들에 의해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와 다른 점은 자유연상에 의해 말하는 것들은 우연에 기대는 것들이라 때때로 분석이 틀릴 가능성이 크지만, 꿈에 나온 상징들은 비교적 분명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는데서 객관적 토대가 있을 수 있고 내담자의 내면을 더욱 더 내담자 본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같다. 이 상징성을 위인들의 발견 일화나 인간의 창조력에 연관시킨 것은 꿈이 단지 구속적일뿐아니라 억압된 무엇을 단순하지 않게 표현하는 정신적 에너지와 같다고 보는 것 같다.

나 또한 꿈에 대한 시각적 기억이 지속되는 체현이 돌아오면 그 꿈의 내용을 글로 기술했던적이 있는데 게임 시나리오적인 관점에서 그럴듯해 보이는 전개가 꿈에서 떠오르기도 했다. 각각의 등장 인물들이 각자의 상황에 맞게 벌레부터 신까지 아나몰포시스적이 되서 주어진 문제를 풀면 높은 단계의 존재가 되다가 문제를 못풀면 다시 낮은 단계의 존재가 되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을 꿈꾼적이 있다. 이 휘둘리는 현상이 너무나도 급박해서 나는 잠이 깨어날 무렵 내가 숨을 몰아쉼을 느꼈다. 내가 오랫동안 표현이 억눌려서 글로서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는 그림만 그리는 만화지망생처럼 되었을 때도 내가 인식못하는 영역으로서의 서사적 기억이 존재했던 것 같다. 이게 무의식의 영역에서 꿈으로 자유로운 서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무래도 현실 삶에서 억압된 것들, 자유로운 상상력이 억제된 사람들은 꿈이 도피처라는 말도 있듯이 의식하지 않고 지나치는 내면의 표현으로서 꿈이 가지는 위치는 확고하고, 이를 정신적 치유의 일부로 삼은 프로이트나 융, 아들러, 그외 정신의학자들의 발상은 참이 되는 면이 크다. 내 관점은 융에 가까운데, 꿈에 대한 피분석자의 내면에 집중해서 꿈에 나온 소재들에 대한 이해를 하자는 것이고, 이는 상징에 대한 이해와 유관하다는 점에서 이 책에 나온 내용들이 흥미를 끌었다.

물론 객관화하다보면 꿈의 소재가 지닌 상징성에 대해 정형화된 해석을 할 가능성도 없지 않겠으나 그래서 융 학파 정신의학자들은 인간 정신의 다양성과 무한함을 강조하고 있다. 일견 객관성은 일의적이기도 하고, 일의적임은 분석의 고지식함으로도 연결되지만, 융 학파의 기본 정신은 다양성과 무한함을 전제하면서 바라보는 것이라 꿈 역시도 자기실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기조만 설명하고 있고 융이 말한 기반에서 내 의견을 말해서 그렇고 그런 글처럼 여겨진다. 이해는 잘 한 것 같다. 압축해서 말하느라 단락에서 잘 안이어지는 문장들도 있을 것 같은데 일단 흐름상으로는 말이 된다.

Author: Jae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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