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체험주의 철학이 구명적인 철학인가 (신비주의에 기대는 것이 왜 아닌가) 에 대한 직관적 설명

체험주의 철학의 모토는

• 철학도 경험을 중시해서 과학 친화적어야 한다
• 구명을 하는 칸트처럼 절대화된 규범보다 경험에 의한 구명을 해야 한다
• 영웅처럼 만들어주기보다 일상적인 고양을 하게 해주면 충분하다
• 실용적인 관점에서 모든 철학은 반구명이 될 가능성이 늘 있다
• 최대의 목표는 고난을 받은 사람이 잘 성장하도록 교육적으로 보장해주는 이론의 개발이다
• 사람은 신체화된 조건에서 살아간다
• 인지과학을 받아들여도 구명이 가능하다
• 도덕적인 분들이 오히려 사회에 해악이 된다

이런 것을 제시하는데요. 초견상 논란이 되기도 하고 오해가 있기도 합니다. 우선

• 칸트와 같이 구명적인 철학을 제시한 학자에게도 비판을 한다
• 왜 구명받는 소년이 신체화되었다는 언급도 하고 왜 영웅이 아니어도 된다고 하는가
• 인지과학을 도입하면 철학의 고유성이 상실되지 않나?
• 도덕적인 분들이 왜 사회에 해악이 된다고 주장하나?

이들 논점은 모종의 과학주의나 자연주의가 될 때의 표현이 체험주의에서도 유사하게 등장해서인데요. 이 경우에는 체험주의는 철저한 경험중심적인 구명 이론이고, 경험적인 탐구에 의해 실용화되어 있는 이론 체계가 변용될때 구명을 해치게 된다는 전제를 착안해서 의견을 제시하는 철학입니다.

하나씩 설명하면요.

(1) 왜 체험주의인가?
체험주의는 철학적 학설의 하나로 인지과학자였던 레이코프에게서 모티브를 얻어 철학자 마크존슨이 철학적으로 정교화시킨 학설입니다. 레이코프의 저서를 보면 철저한 범주구분을 비판하고, 철학의 사변성을 부정하고, 과학을 도입하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초견상 자연화된 철학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구요. 한국에서 체험주의를 보급하시는 노양진 교수님의 강연을 본 분의 인터뷰에서도 나오지만 신체적 기반을 말하는 것에서 포스트모던적인 인상도 있다고 합니다.

이는 현대화된 한국의 윤리적 상황에서 있는 오해인데요. 체험주의는 고난을 받은 소년이나 소녀를 (특히 소년을 예로 듬) 구명하려는 철학으로, 인지과학적이지만, 규제적인 과학성이 아닙니다. 직관적인 예를 들자면 소칼이 포스트모던의 허구성을 폭로한 저서를 냈듯이, 구명적인 인지과학의 공통점이 있네요.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인지과학 분야에서는 라캉류의 정신분석도 비판하기도 하고, 과학적이지만 구명적인 토대가 확고합니다. 이를 토대로 전개되는 것이 체험주의이구요.

마크존슨이 쓴 “마음속의 몸(The Body in the Mind)”에서 보여졌듯이 곤란을 받아온 소년들은 어릴적부터 갖가지 오해에 시달립니다. 신체적으로 남자니, 성적으로 추구한다는 오해도 받고 이로부터 공동체에 발을 붙이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이 경우에도 정도를 지키는 분들이 있으니, 이분들의 사정을 살펴볼때는 남성이라는 범주나, 성적임과 같은 절대화되기 쉬운 범주 구분을 하면 안된다는 모토를 가지고 있네요.

칸트는 절대화된 윤리 토대를 구축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체험주의 철학은 칸트도 비판합니다. 이유는 실용적인 관점에서 칸트가 쓰이기도 해서입니다. 예를 들면 정언명법이라는 의무론적인 윤리관을 정언명령으로 바꾸어 실천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해가 되시나요? 이는 단지 언어적 차이일뿐이 아닙니다. 실용적으로 사회분위기가 루저담론과 심판의 분위기로 뒤숭숭하면, 평소에 구명적이시던 카뮈나 사르트르 전공자분들도 이분들의 사상을 재해석해서 가르치시기도 하고, 실재로 한국에서도 이랬구요. 로티처럼 무조건적인 신뢰로 홀로 된 존재를 옹호할때, 포트스모던을 선택해도 구명을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포스트모던 긍정만 되면 배척하는 입장도 가능하듯이, 칸트도 그렇게 채택될때가 있다는 것에 대한 착안입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칸트가 구명적인 철학자니, 구명적으로만 이해되는게 합리적이지만, 경험적으로 보면 칸트 철학에 담긴 의미는 다양해서, 칸트를 비판하기도 해야 구명이 더 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체험주의는 이를 가리켜 공공적인 믿음과 일상적인 판단의 차이를 말하고 은유성도 도입하고, 기호에 체험이 유폐된다는 것도 제시하구요. 동양철학하시는 분들이 도입하면 恕 개념과도 연관시키십니다. 우선 공공적으로 우리는 일상적인 판단을 다 말하지 못하기도 하구요. “사석에서 같이 술마시면서 하는 말”이라고 하기도 하듯이 공공성에 데이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습니다. 그리고 구명을 받아야 할때도 남들에게 함부로 다 말하지 말자는 것이 도덕성인데, 이 과정에서 심각하게 고난을 경험하기도 하듯이, 은유성이라는 기초 개념을 제시하네요.

은유성은 본질적으로 한 단어가 단지 하나의 의미만 있는게 아니고, 때로는 임의적으로 부여한 의미가 있어서, 곤란을 경험할때 기호에 체험이 유폐되기도 하듯이, 고난의 상징이라서기도 하구요. 칸트처럼 구명적인 철학도 실용적으로, 경험적으로 보면 구명적인 철학이라는 개념어에서도 다른 의미가 사상되는게 실재적 현상이듯이, 절대성보다는 보편성을 믿고, 모순이 가능한 현실에서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이론은 경험적이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그래서 구명을 받는 소년에 대해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과학이라고 해서 다 지지하는 것은 아니구요. 정신과의사 다마지오처럼, 과학적 언어로 말하더라도 구명성을 보이는 정성을 들이는 경우를 롤모델로 추천하거나, 학생을 시민으로서 길러주는 것을 철저하게 제안한 교육철학자 듀이를 추천합니다. 이 둘의 입장을 간단히 정리하면 경험적 탐구가 되죠.

칸트는 해석학에서도 비판하지만, 철두철미한 체계가 실용화되면 오히려 곤란을 가중시키기도 하고 이것이 도덕적인 분들이 한번 돌아서면 더 무섭게 된다는 것의 기반이네요. 그래서 체험주의를 하시는 경우에 다른 철학에 대해 비판적으로 시사하기도 합니다. (비난조가 아님)

(2) 왜 구명받는 소년이 신체화되었다는 언급도 하고 왜 영웅이 아니어도 된다고 하는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시는 의문점인데요. 다들 느끼실 수는 있는데, 철학 논증의 특성상 추론에 맞기기도 하기에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하십니다. 특히 왜 영웅처럼 안해주고 구명이 된다고 할까라는 의미가 과학성과 만나면 의문이 되죠.

이는 경험적으로 보면 해결이 됩니다. 상담학이나 심리학, 정신의학을 연구하시는 경우에 임상에서 만난 분들은 평범한 우리들의 이웃입니다. 그분들 중에서는 정말로 뛰어난 학문적 역량이 이미 있으신 경우도 있지만, 그냥 평범하지만, 공부에 가능성이 있는 경우도 있고, 오랫동안 구명을 못받아오면 신체적으로 잘 지치기도 하시죠.

영웅처럼 하려면 영어에서 말하는 늘 긴장한 상태(always max)가 되어 고난체험을 하던 시절의 피폐성이 돌아오기도 합니다. 이 경우, 구명을 해주고, 교육기회를 주면서, 일상을 잘 살아가게 도우면 된다 (신체화된 일상을 지켜주고, 영웅보다는 일상에서의 고양을 하게 해주면 된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신체에 유폐된 존재라고 하는데, 언어의 특성상, 이 배경을 설명하지 않으면 왜 유폐되었다고 말하는지 의문이 있는데요. 이것은 신체적인 기반을 긍정하지 않으면, 경험적으로 있는 해석들, 예를 들면 어느 저널리스트가 “당신은 병자가 아닙니다”라고 할때 신체적인 도전을 받은 것이 인식선상에서 제거되는 것과 같은 해석을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신체성을 인정하면, 제약적인 것도 해결되고, TMS나 tDCS, 바이노럴 비트에도 더 자가당착이 안되게 되는 것입니다.

(3) 인지과학을 도입하면 철학의 고유성이 상실되지 않나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심리철학과 그 분과 학문에서 인지과학의 성과를 도입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환원성과 비환원성, 명제적 지식과 비명제적 지식, 좁은 문제와 넓은 문제, 모듈화된 인지 등등의 개념에서 이미 인지과학을 합니다. 특별히 체험주의에서는 입장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겠으나, 환원성과 비환원성의 이분법보다, 창발성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고, 상황적 느낌을 인정하는 비명제적 지식도 인정합니다.

이에 대한 논의는 경험적인 토대 위에서 하기에, 심리학의 연구를 도입하기도 하죠. 하이트의 “도덕적인 분들이 사회에 더 해악이 된다”는 것을 지지하는데, 이와 관련된 경험적 연구가 심리학에서는 많네요. 한가지 예를 들면 기독교 교인 분들이 평소에 봉사활동도 하시고, 신앙심도 깊으시지만, 어떤 분쟁이 있을때 윤리적 사안에 대해 갈등이 있으면 믿음보다는 세속적 결정을 내리면 기독교라는 배경이 구속적이 되듯이 (이는 정신의학자 융이 연구한대로 종교가 공동체라, 신실한 체험도 하게 하지만 정신적인 억압도 한다고 한 연구가 있네요) 종교라는 개념이나 범주 구분과는 다르게 경험적으로 보면 사회적 해악이 되기도 함을 주목합니다.

이 경우 인지과학을 따르면 치유적인 연구 결과가 제공되니 이를 따르면 통계나 실증적인 연구가 지지 배경이 되어 순수하게 논리만을 따르거나, 합리성이 절대화되면 종교라는 난제에 대한 논의가 사변적이 되기도 하는 것을 방지해줍니다. 예를 들면 통계를 토대로 말할 수 있게 되고 위에 언급한 칸트조차도 실용화되어 반대 의미로 된 현상이 언어에 의해 가려지는데 대해서도 칸트를 우회하지 않고 즉시 비판이 된다는게 장점입니다.

다마지오처럼 “사람은 항상성 유지를 본능으로 하기에 건강해야 할 존재다”처럼 말하는 것도 돌려말하지 않고 과학적인 표현을 써도 구명성이 해해지지 않음을 보장합니다. 여기서 “항상성”은 늘 “성적인 것”이 아니고 “건강 일반”이고 마음의 건강이기도 하고, 각자의 권리이기도 해서 패러다임 케이스로 마크존슨이 예를 듭니다.

마크존슨은 분석철학의 개념에 체험주의 모토를 접맥해서 논의를 정교하게 이어갑니다. “마음 속의 몸”을 원서로 읽으시구요. 번역서도 있으니 보시면 감탄도 됩니다. 순수 과학이론이 아니라 철학적이기도 하다는데서 놀라움도 주네요.

(4) 도덕적인 분들이 왜 사회에 해악이 된다고 주장하나?
이는 루저담론이 지나간 한국에서 특히 강한 반감인데요. 많은 경우 도덕적임에 대한 인식이 절대화된 엄숙주의 전통에서 포스트모던한 시대로 이행해서입니다.

도덕적인 분들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는 언어적 유희가 아닙니다. 이제까지 설명했듯이, 공공적인 경험 영역의 언어에서 담을 수 없는 경험적인 사적 영역의 이해를 하자는 의미죠.

모든 분들이 각자의 표현 정도는 다르지만 다 아시는게 모친과 어릴적부터 애증의 관계를 토대로 살아온 사람은 어른이 되도 그제서야 토로하게 되기도 하고 성격적으로 많은 결함을 부여잡고 살게 되기도 하는데요.

생각보다 이 삶의 과정은 복잡해서, 칸트에서도 설명되었듯이 도덕적인 분들의 선택에 의해서도 휘둘리기도 합니다.

순수한 관점에서 이 역설을 표현하는 것이 “도덕적인 분들이 사회에 해악이 된다”는 것을 지지하는 것이구요. 모든 것은 소년의 곤란을 돌봐주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네요.

칸트에 의해서도 휘둘리지만, 꼭 자동적으로 포스트모던이지도 않구요. 포스트모던이더라도 베르그송과 들뢰즈를 읽고 예술적 감성을 논의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고, 실존주의 철학으로 니체를 읽고 텍스트성을 토대로 건강성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발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것은 절대화된 상식의 편견을 넘어선 경험적인 특성이네요.

이는 체험주의가 아니더라도 마크존슨이나 맥도웰이 저서에서 말하듯이 로티를 긍정하고, 로티가 제시한 것을 더 덜 모순적이게 논의해서 발전시키는 현대 영어권 철학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다만 체험주의는 인지과학에 기반하기에 사변보다는 경험이라는 토대가 더 굳건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마크존슨에게 직접 배우고 돌아오신 노양진 선생님은 인지과학 친화성을 저서에서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직관적인 표현으로 해설해보았습니다. 체험주의의 기반이 정의로움이라는 것이 핵심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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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청색공책
청색공책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이자 정보 제공자입니다. 어린 시절의 몸 고생 마음 고생을 이겨내고 활로를 찾습니다. 평소에는 주로 탐구 생활을 하고 있으며 글쓰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관심분야가 특징이구요. 도서관 사서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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