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심신환원성의 문제

의식의 독립성을 제안하는 데카르트조차도 인간이 의식과 신체를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일정 부분 의식은 물질적 대상과 불가분리적이다. 인간은 신체를 지녔을 뿐아니라 의식을 지닌다. 그러하다면 물리적인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리될 수도 있고, 논리적 관계일뿐이라고 추리할 수도 있다. 어느 입장이든간에 신체 현상과 의식 현상이 서로 떨어트릴 수 없는 불가분의 현상이라면 이로부터 철학적 논제가 따라나오게 된다. 의식은 신체로부터 남김없이 환원가능한 것인가? 인간이 신체를 지닌 존재라면, 논제의 답변이 요구되는 것은 의식 현상에 대한 기술의 문제라고 사르트르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의식만을 인정하기보다 의식 현상이나 신체 현상, 사건이나 사태 같은 현상을 나타남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환원가능성의 명제를 세심하게 부정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인간의 의식과 사물 현상의 다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동물도 그렇겠지만, 인간의 의식은 사물과 다르다. 인간은 지향적 성격을 띠는 반면 사물이 의식을 지닌다고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과 인간의 신체 또는 물질적 대상은 같은 것이 아니다.

나타남의 현상으로서 의식과 신체는 현상적이지만, 의식은 지향적이고 신체는 보조적이다. 발생적으로는 태아가 의식보다는 신체의 발달에 따라 의식을 지니게 되지만, 심신환원 문제에 대해서는 본래적이기보다 논리적인 관계인 것이 의식과 신체의 본질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타남의 현상으로서 의식은 의식 활동으로 나타난다. 이는 초월적인 기반에서 나타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는 의식 활동이 나타남에 대한 나타내보임이라는 것이다. 나타내보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현상학적 주체로서 외적 세계는 주어짐으로 나타나고 의식은 이를 향해 있다는 것이다. 심신환원 논제와 연관을 시켜보면 나타남이라는 것은 물리적 환원과 흡사해보인다. 그러나 그는 현상학자로서 나타남의 근원을 보존하려고 한 것으로서 버클리의 관념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가 나타남을 인정한 것은 현대 물리주의에서 비환원적 자연주의와 연계될 가능성이 남아있다. 인식 주체가 나타내보이는 것으로부터 나타남을 인식한다면 그 현상적인 것은 인정해야 되고, 다만 의식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요컨데 소로우 같은 자연주의를 기반으로 융 같은 자연주의를 실천하는 것이 어떤 근거에 의해서 되는가하는 것이다. 자기 기만이나 무화작용은 인식 주체들의 지향점들의 현상이다. 즉 그는 사태가 그것대로 나타나는 것으로 인식되고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의식 현상에 주목했다.

요컨데 의식은 의식 활동에 의해 현상학적 주제가 된다. 인간의 의식 현상을 해명할 때 중심이 되는 현상이 의식 현상이고, 그 특유의 성격으로 현상하는 것은 지향성이라는 것이다.

이 지향성이라는 의식 현상을 사르트르는 어떻게 규명하는가?

사르트르는 현상학자 브렌타노의 전통에서 현상학을 구축한 훗설의 이론을 참고한다. 분석철학자이면서 브렌타노를 연구한 치좀과 비교점이 있다. 치좀은 심리적인 것과 비심리적인 것을 구분한다. 그는 지향성이 단순히 물리적인 용어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로부터 1인칭 진술과 3인칭 진술의 구분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르트르 또한 그의 해석 초기의 저작에서 “나”라는 1인칭 대상과 자아의 초월성을 다룬다.

이 두 사람의 이론에 따르면 의식은 대상들을 지시한다. 심리적 활동은 그 무엇에 대한 지시성이다. 우리가 “배가 고프다”라고 느꼈다면 “도너츠”를 향해 의식이 향해있다. 이보다 더 고차적인 의식인 사유의 경우에도 (신념, 소망 등) 지향적이며 그 무엇에 대한 것이다. 이는 배가 고픔이 신체적인 것이지만 심리적 활동을 일으켰다면 의식 현상은 물질적 대상 이전에 중요성을 갖는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도 코기토의 중요한 의미는 본질적으로 자기 의식과 관계적인 것, 무엇에 대한 지시적인 관계라고 보았고 이를 전형적인 지향성의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노선을 따를 때 발생하는 문제는 지향성 이론의 공통된 특성이다. 예컨데 자기 의식이 향하는 대상이 없을 가능성이 있다면, 관계라는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 문제가 있게 되지 않을까? 이는 관계되는 존재가 의문스러울 경우 그 관계를 말하기가 난처한 경우이다. 예컨데 비존재를 지향하는 것은 의식인가? 착란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관계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 문제를 피하려면 어떤 현명한 구분이 필요해진다.

치좀은 존재론적 명제와 심리적 명제를 구분했다. “X는 Y를 지향한다”라는 현상적 진술은 Y가 실재 대상인지에 의해 관계성을 지닌다. Y가 실재 대상이라면 존재론적이고 비실재 대상이라면 심리적이다. 사르트르의 경우는 독특한데 심리적인 것도 의식 대상에게는 나타남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의식이 전적으로 신체 밖에 있거나 전적으로 의식 안에 있다기보다는 무엇에 향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의식 현상은 의식 안에 있지도 않고 신체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향적 내재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는 실재적 대상을 직접 바라볼 수 있고 대응이나 표상이 가능하다. 우리가 감각하는 것이 곧 현상적 대상이라면 의식 속에 또다른 내재적 대상이 있을 필요가 없다. 치좀 식으로 말하자면 심리적 명제에 의해 존재론적 명제가 관계되고 존재론적 명제가 없더라도 심리적 명제가 성립한다. 즉 허구의 문제에 부딪히는 지향적 내재에 대해 의식 자체도 나타남이라고 보면 “X는 Y를 지향한다”라는 진술이 거짓이 되지 않아도 된다. Y를 사르트르는 아날로공으로 명명하는데 이는 의식이 상상적 대상을 의식할 때 그 대상이 되는 것이다. 즉 지향적 내재에서는 대상 자체가 없지만, 사르트르는 그럼에도 나타남이 있다면 그것은 의식이 지향하는 대상으로, 존재적인 것이 없더라도 심리적 명제는 성립한다는 것이다.

아날로공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無이지만, 대상으로서 나타난다.

​사르트르가 의식의 관계적 성격을 말할 때나 지향성의 존재론적 명제를 소홀히 할 때 이는 단지 현출하는 대상에 대한 대응으로서만 의식이 존재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명백하게 눈에 보이는 대상을 인식할 수도 있고 눈에 안보이는 대상을 인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할 가능성이 있거나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대상을 인식할 수도 있다. 예컨데 우주의 어느 별에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인식해볼 수 있다. 그리고 몇년전 죽은 친구는 여전히 우리의 의식 속에 있다. 그러나 無로 인식된다. 전자와 후자는 아날로공의 특성을 공유한다. 양자는 단순한 비실재 또는 지향적 내재가 아니다. 이로부터 실재적으로 기존 현상학의 난제를 풀어냈다.1

보편적인 관점에서 물리주의자들은 완전한 환원을 추구한다. 반면 비환원주의적인 물리주의자들은 조건적 환원을 추구한다. 사르트르는 이 둘을 모두 택한다. 나타남을 인정하고 있으므로 신체의 현상을 부정하지 않지만, 의식에 대해서는 세심함을 요구한다. 이는 비환원적 자연주의와 노선을 같이 한다. 소로우의 자연주의를 토대로 한 융의 자연주의를 실천할 때 無를 인식하는 것은 착란이 아니다. 자기기만도 아니다. 이는 사르트르가 자신의 학문적 과업으로 보여주려고 했던 핵심 테제이며 그것은 지향성 이론에 의해 지지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無를 여기에 있게 하는 것의 한 양태인 무화작용을 의도하지 않는게 중요하다. 이는 그의 인간관이다. 심신환원이 필요하다면 치유를 추구해야 함이 시사된다.

그의 학문 활동이 자유를 소재로 택하거나, 직접 실존주의적 정신분석을 시도한 것도 치유적인 것에 관심이 있어서였던 것 같다. 예컨데 작품 활동이 주로 그려내는 극한 상황에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갈등과 자유 상실을 보여주고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항해서 의식을 강조했다는 해석 또한, 치유를 추구한 것이다. 즉 모종의 환원에는 반대하지만, 의학적 관점에서 치유를 의도할 때 특수한 환원에는 지지를 표명할 것이다.

궁금한 것은 학계에서 제안되는 해석 중 하나가 사르트르의 기본 입장이 신경증에 대한 치유적 입장임에도 플로베르 평전에서는 플로베르에 대한 작가론적인 해석을 신경증적이라고 했다는게 있는데 이는 그의 이론적 규명 대상이 자유라서 그러한 것이겠지만, 어떤 대목에서 언급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참고를 안하고 있다. 신경증이라고 묘사한게 본의라면 이는 그가 환원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도 된다고 본다. 치유를 전제로 한다면 그의 언급은 조건부 환원이다.

無라는 단어로 지시되지만, 무화작용의 無와, 아날로공으로 친구를 추억하는 無는 이 글에서 구분된다. 사르트르의 이론이 한 단어에 여러 중의적 현상을 포함시키는 포괄성을 의도해서 생기는 의미 차이인데 의식 현상에 대해 無는 좋은 의미이기도 하고 나쁜 의미이기도 하다. 암투적인 것을 주로 의도한 무화작용에 비해 친했던 친구의 사진을 보는 아날로공의 無에는 사르트르는 긍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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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청색공책
청색공책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이자 정보 제공자입니다. 어린 시절의 몸 고생 마음 고생을 이겨내고 활로를 찾습니다. 평소에는 주로 탐구 생활을 하고 있으며 글쓰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관심분야가 특징이구요. 도서관 사서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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