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웰이 제시한 세계와 이성의 마찰에 대한 기조

세계는 인식독립적인 실체다.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돈다”라는 명제는 선험적이며 물리적으로 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개념적으로 안다. 예컨데 (1) “달은 지구의 위성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우리는 “달”, “지구”, “위성” 같은 실체를 개념적 직접성으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관찰적 명제로서 지지될 수 있다. 하지만 (2) “독수리의 꼬리깃털이 다빈치를 쓰다듬은 것은 그의 유아기 성애를 의미한다”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우리는 똑같이 이미 주어진 개념을 토대로 이해한다. 즉 세계는 관찰가능한 실체로 존재하고 우리는 개념을 토대로 인식하는데 이는 선험적으로 받아들여진 개념에 의해 가능하다. (1)과 (2)는 우리의 인식이 이미 선험적이고 개념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에서 소여의 신화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맥도웰은 소여의 신화를 주체와 세계의 마찰로 이해하는 것 같다. 즉 세계를 인식할 때 인식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개념적 마찰이 된다는 것이다. 개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소여의 신화를 일으키기도 하고 해소하기도 한다. 맥도웰은 소여의 신화가 일으켜지는 원인을 이성의 사용적 맥락에서 일으켜진다고 본다. 언어적인 것, 개념적인 것, 사용적 맥락의 것은 주체에게 주어진 무엇으로 나타나고 이는 주체와 세계의 마찰을 야기한다.

주어진 무엇을 이해한다면 (2)의 경우처럼 자발성과 수용성의 마찰이 일어난다. 주어진 것에 대한 강박을 일으킨다. 소여의 신화가 속박적이 된다면 속박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어떤 개념으로 세계를 해석하느냐가 중요해보인다. 그는 개념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구분해서 바라본다. (1)도 개념에 의해서이고 (2)도 개념에 의해서지만, 전자는 마찰이 없는 반면 후자는 마찰이 있게 된다. 개념적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이를 아는데 있어 이성의 역할이 중요하다. (1)과 (2)는 선험적이라는데서 주어진 것이다.

즉 개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소여의 신화를 일으키기도 하고 해소하기도 한다. 소여의 신화에 빠지면 주체와 세계는 마찰을 일으킨다. 이로 인한 속박이 극단적인 경우 선험적, 철학적 불안에 빠지게 된다. (1)과 같은 개념적 자발성은 소년에게 꿈과 희망을 주지만, (2)와 같은 개념적 자발성은 소년에게 개념적 속박을 수용하도록 강요한다. 개념적으로 속박되지 않는 인식 기반은 선험적인 이성에 의해 가능하다. 개념의 영역과 구분되는 이성의 영역이 있어서, 이성의 올바른 운용이 개념이 얼마나 세계와 마찰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선험적으로 인식독립적인 기반은 개념이고 이는 무속박적인 개념이어야 한다. 우리는 최소 근거로서 개념에 의한 직접적 인식을 할 수 있다. 예컨데 (1) “달은 지구의 위성이다”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 개념이지만 관찰적 명제로서 확실하다. 소여의 신화를 거부하는 맥도웰의 논증은 개념적 직접성이다. 그는 지각경험도 인정한다. 이는 언어적으로 매개가 되는 인식이지만 관찰적으로 세계에 대한 직접 경험에 기반하고 있고 이 개념이 곧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우리는 개념적으로 세계를 직접 인식한다는 것도 성립한다. 이 직접 인식은 세계 자체가 이성적으로 실체를 개념화한 언어에 의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매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매개적인 것은 실재적 관찰에 의해서도 확인이 된다. 따라서 맥도웰의 이론은 선언적이다. 경험이나 이성 둘 중하나만 택해도 참으로 확인된다. 선험적으로 인식독립적인 기반이기 때문이다.

칸트도 공간을 직관하고 시간은 개념으로 안다고 한 것과의 유사하다. 경험과 이성 두 기제를 모두 인정한 것이다. 세계를 인식하는데 있어 오감적인 측면에서 직관된 관찰은 개념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거쳐서 의미있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인식에 채택되는 이성의 영역은 개념과 구분된다. (1)은 이성이 개념을 무속박적으로 운용한 예이고, (2)는 속박적인 예이다. (1)처럼 물리적인 실재 그대로를 개념화하면 주어진 것에 대한 강박은 사라진다. 그러나 (2)처럼 비합리적인 이성의 운용은 마찰을 일으킨다. 이성적이고 개념적이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자발성과 수용성이 전제된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 알 수 있다면 물리적인 존재성이 언어로 매개되어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이 구별에 상관없이 세계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 이는 (1)의 전제가 된 과학적 관찰이 올바른 이성의 영역에서 경험적 관찰에 채택되어 수용할 수 있는 세계상을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학적 관찰은 주체에게 세계에 대한 직접 지식을 제공하며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지식은 주어진 것의 개념적 속박이 아니다. 즉 소여의 신화는 일으켜지지 않는다.

맥도웰의 개념성, 언어적인 것은 표상주의와는 다른 것 같다. 사용적 맥락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최소 근거로서 전제해두는 무엇이 있을 것 같다. 이를 (1)이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글은 기조로 작성한 것이며 맥도웰의 일차저작인 <마음과 세계>를 다 안읽고 생각난 것을 정리한 것으로 개인적인 노트로 작성되었습니다. 읽고 검증이 되면 긴밀하게 논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Author: Jae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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