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건강성으로 읽는 것과 상대주의의 구명성이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상대주의는 인식론의 한 입장인데요. 세상에 존재하거나 실천되는 진리 결정에서 진리는 존재하지만 명제들끼리의 상대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입니다. 절대성에 반대한다고 해서 상대성의 철학 즉 상대주의라는 것이구요. 보편성은 인정하는 학설입니다.
세상 모든 일들은 원인과 결과, 전제와 결론으로 귀결됩니다. 어떤 선택이나 판단에 있어서 이들 원인과 결과가 있을 것이고, 이를 전제와 결론으로 채택하면 선택과 판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런 분석의 과정에서 각각의 원인과 결과는 명제로 나타내어지고, 이로부터 진리 결정이 어떠했는지를 검토해볼 수가 있게 됩니다.
원인은 보조조건으로 세분화가 되구요. 결과는 결정 조건이 됩니다. 이 두 조건이 각각 전제와 결론을 드러내주죠.
진리 결정의 구조는 바로 이 보조조건과 결정 조건을 알아내서 명제들끼리의 상대적인 관계(relative relation)를 살펴보는 것으로 드러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판단을 할때 아주 엄밀하게 하지 않습니다. 거부감이 있다는 것인데요. 이 거부감이 진화의 관점에서 마음의 불편을 느끼는 조건을 고도화했고, 이 고도화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관점화한 체계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관점화된 체계는 다수가 느낄때, 객관화가 되어 세상을 구성하게 되죠. 이는 객관화된 구조가 사람을 제약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주의가 절대성의 상대 개념으로 상대성(relativism)을 제안하는 것은 우리의 진리 결정이 늘 균일하지 않다는데서 참이 됩니다.
철수는 동수보다 키가 크다 (생명과학의 명제)
성수대교는 당산대교보다 짧다 (건축학의 명제)
신성일은 이주일보다 미남이다 (예능계의 명제)
이 크로와상은 저 크로와상보다 맛있다 (요리계의 명제)
시바스 리갈은 백세주보다 비싸다 (화류계의 명제)
이 빨간색은 저 빨간색보다 더 진하다 (미술계의 명제)
이런 비교에 의한 것이 판단의 근거이고, 과정인데요. 진리 결정은 이러한 근거와 과정에 존재했던 원인과 결과, 전제와 결론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인식 판단입니다.
원인과 결과라는 구조에서도 드러나듯이요. 이는 시간성의 원리로, 인과이기도 하고, 일대기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죠.
누군가
명제1. 그 시험 감독관은 솜씨가 좋다.
라는 명제1 하나만으로는 진리 결정이 안됩니다. 그래서 조사와 탐구를 거쳐가다보면 진리 결정에는 원인이 되는 보조조건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원인1. 도덕 판단은 인류의 본능이다
원인2. 도덕 판단에는 각자의 욕망이 개입한다
원인3. 공공적인 도덕 판단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
이런 보조조건들이 개입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정당화를 하게 되는데, 이때의 원인들의 집합은 명제1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데 기여합니다.
이런 판단에는 실행성이나 실용성이 중요해서 원인1, 원인2, 원인3과 다르게 사후정당화의 관점에서 지지되기도 하죠.
전제1. 도덕 판단은 인류의 본능이다
전제2. 도덕 판단에는 각자의 욕망이 개입한다
전제3. 공공적인 도덕 판단은 반드시 인정되어야 한다
전제4. 개인의 도덕 판단은 주관적이기에 인정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살펴보면 전제들의 유기적인 결합에 의해 결론이 도출됩니다. 이 경우, 시간의 흐름에 의해 흘러간 강물은 다시 오지 않듯이, 전제에 대한 결합을 판단하는데에는 개인의 경험이나 입장, 생각, 취향에 따라 매우 큰 스펙트럼을 갖게 되는데요. 비교를 할때 있었던 수많은 차등의 현상들이 그저 편리하게 한마디 표현으로 언표되어 이해되는 것이 인식적인 주목 대상입니다.
예를 들면
명제2. 그 유튜브 채널은 영웅이야
라는 명제2는 딱 보면 유튜브 칭찬이지만
명제2의 전제1. 나는 그 유튜브의 국뽕이 좋아
명제2의 전제2. 왠지 기분나쁜 체험이 해소되었어
이런 전제들도 가능합니다.
이런 적용이 2, 3세때부터 있던 어느 내담자분들의 일대기였다면, 건강성이 해쳐질 수 있고, 정치적으로 소극적이 되어 자신만이 아닌 동료분들도 힘들게 되죠. 도와주려고 해도 한계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분석철학을 하는 경우에도 니체가 텍스트성으로 읽힌다는 체계에 착안해서 소년이 어떤 소질이 있는지를 살펴서 돕는 것도 가능해지네요. 로티가 바라보는 것도 같습니다. 다시 말해 분야별 구분은 일종의 독단이고, 구명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소년을 위하는 방법은 여럿이라는 것이죠. 심리학에서 핍박받은 소년을 공동체에 편입시켜준다는데서도 참입니다.
푸코도 그렇고 들뢰즈도 그렇고 구명에도 쓰이는 문화가 존재하구요. 푸코는 자기배려의 메타포적인 해석으로, 들뢰즈는 베르그송과 읽고 예술적 감성 함양에 쓰는 것입니다. 특히 사진 철학으로 접근하면, 들뢰즈와 베르그송은 사진적 사실주의의 반영으로도 되구요. 사진이 장비에 대한 이해를 하면 광학과 같은 물리학도 부여하게 될 수가 있죠.
초견상 왜 구명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이야?라고 의문을 가지시는데 대한 해설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