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라는 것은 생각의 규칙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덕목입니다. 생각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무질서가 횡횡하고 불의나 어떤 특수한 일이 발생해서 사회의 혼란이 있게 되서죠. 생각은 곧 실행의 근거가 되는데요. 예를 들면 묻지마 살인의 경우에 자신이 무언가 피해를 받았다는 것에서 유래한 실행으로 사회에 큰 혼란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논리를 지키자는 것이 철학에서의 전제가 되는 이유가 됩니다. 철학 또한 고대에서 발원될 당시에는 전쟁이나 투쟁으로 귀결되던 문제를 언어와 말로 해결하자는데서 유래한 것인데요. 논리를 지키자는 근원이 이러합니다.
그런데 논리가 정교화되고 추진력을 담지하게 되면서 사회가 다각화되고 급변하는 질서 속에서 논리 자체에 대한 반감도 있는게 사실이죠. 이런 질서의 변화에서 꼭 이게 옳으면 저게 틀리다보다는 논리라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변질되는지를 살피면, 어떤 논리를 지켜야 하는가가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논리의 질서는 양의적입니다. 정말로 논리적인 구명성도 달리 응용되는 세태죠. 그래도 논리적이어야 한다면 어떤 논리인가가 중요합니다. 모든 분쟁이나 사회 문제는 논리의 양의성에 근거합니다. 여기에 다치 논리라고 해서 양의성을 극복하는 논리도 있네요. 양의성은 대부분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기호로 유폐하는 것과 관련이 큽니다. 한국 사회의 문제도 그렇고 세계적으로 정보화 사회에 대한 회의감이 있는 이유이네요. 야기에 언어 기호의 의미성이 지닌 양의성으로 되어 의심이나 해코지가 횡횡하는 사회가 됩니다.
논리도 하나의 설정 기준이 되면 정치와 같이 현상적으로 비난도 정당화되는 조건에서는 이용 가치가 되죠. 그런데 이 이용 가치는 누구나 필요하다고 보면서 외적으로는 아닌 것처럼 되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윌리암 제임스가 말한 개념이 됩니다.
그러니 솔직하다, 정직하다의 의미조차도 소중한 무엇이 됩니다.
예를 들어보죠. 흔히 예로 들어지는 삼단논법인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너는 사람이다
너도 죽는다
이 논리에서 보여지듯이 논리가 고도화되면서 있게 되는 논리의 문제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논리가 말이나 언어로 되었다고 할때의 분별력이 자율성이라, 이를 실천하는 토대에서 문제가 됩니다. 묻지마 살인은 그냥 행동으로 표출된 실행으로 부당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논리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 문제가 되는 매크로 사용이나 기술적인 것이 들어간 피싱 범죄들 예를 들면 외국 서버에서 일어난 일과 같은 것은 논리적인 것을 악용하려는 사례이고, 사회에 무질서가 횡횡할때 있었던 프로이트 학파가 융 학파를 비난한 사례 등도 같습니다.
그러니 논리를 지켜야 한다면, 모든 논리가 성립한다보다는 어떤 논리여야 하는가를 논의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것이 변질되면 우리가 최근에 인식한 생윤 문제 논란도 하나의 구성 성분이 되죠.
이런 의미에서 “교육이 잘못되었다!”라고 분명히 논리를 갖추어 말하면 이것도 하나의 일원성이 되어 버립니다.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은유가 종합적인 말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이유입니다. 다들 나쁘다는 것을 알아도 외적으로는 아닌 것처럼 되는 그 질서의 이면에서 희생받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청소년 자살율이 높은 것이 그 근거입니다.
프로이트 학파와 융 학파의 관련성도 사실 논리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만 이를 위배할때, 언어로 이를 구성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문제이고, 행동으로는 안하더라도 타인의 행동을 이끌어낸다는데서 심각한 논제죠. 여기에 누군가 그냥 재미로 철학하면서 하나의 논리를 채택하면, 누군가는 이 논리에 치이기도 하네요.
그렇다고 논리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가? 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분법적 프레임의 폐해를 넘어서는 다치 논리도 있습니다. 논리를 지켜야 한다면 어떤 논리인가가 중요한 덕목입니다.




